캬~~무릎에 앉히고 나눈 이야기로는 이런 버젼도 있대요.

캬~~ 이런 인물도 이런 면모가 있네요.  또한 패튼은 아이젠하워와 더불어 흑인으로만 이루어진 부대를 차별하지 않아 몇 안돼는 군 내 인종 평등 면모를 보였다. “여러분, 나는 제군들과 함께 영광스러운 진군을 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영광으로 여기는 바이다.”이런 식으로 점잖게 연설을 시작하고서… “이제 제군들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들어가면 한가지는 말할 수 있을것이다. 30년 뒤 난로가에서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손자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2차대전때 뭐 했어요?’ 라고 물어보면 한번 기침하고 “응 할아버지는 루이지애나에서 똥이나 펐단다.”라고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제군들은 손자를 당당한 눈빛으로 처다보며 말해줘라 ‘아가, 할아버지는 그 위대한 3군과 빌어먹을 조지 패튼이라는 개자슥과 함께 용감하게 진군했단다!”  (원문 : Then there’s one thing you men will be able to say when this war is over and you get back home. Thirty years from now when you’re sitting by your fireside with your grandson on your knee and he asks, ‘What did you do in the great World War Two?’ You won’t have to cough and say, ‘Well, your granddaddy shoveled shit in Louisiana.’ No sir, you can look him straight in the eye and say ‘Son, your granddaddy rode with the great Third Army and a son-of-a-goddamned-bitch named George Patton!) 이렇게 과격한 내용으로 끝맺었다고 한다. 패튼 장군과 함께 싸웠던 미군 참전용시들은 연설의 다른 부분은 다 잊었어도 빌어먹을 조지 패튼이라는 개자슥이라는 대목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지금 진심으로, 우리와 싸우게 될 저 불쌍한 거지새퀴들한테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그가 말하길 처음으로 실전을 봤을때에 긴장과 겁에 질려 몸이 얼어붙어서 죽기 일보직전이였는데, 갑자기 하늘에 그를 데리러온 기라성같은 조상님들이 노려보는 것을 보고 죽어서 그들을 대하는게 더 무서워져서(…)어째 데자뷰가… 용기를 내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한다. ㄴ일종의 임시체험후 과잉보상 박탈심리 대극의 반전 아닐까 생각해봐요.    이분     직속 부하로 이 분이 있죠.  그러니까 미국 정부는 전황이 어두워지니까 우리 철수해요. 이러고 있었다는 거다. 앞서 말한 대로 낙동광에서 밀리면 알지도 못하는 섬으로 남한의 나라수반 + 전국민이 이시를 가야 하는 마당이었다. 거기다 대고 안됨. 우리 무조건 버텨보겠음이라고 말한 시람이 있었는데, 그게 워커 중장이다.  워커 중장은 맥아더에게 남한 시수를 광력히 주장하였다. 맥아더는 일본에 있었고 워커 중장은 한국에 있었다. 최전선에서 직접 낙동광 전선을 시수하는 입장이었던 워커 중장은 한국 장병들을 만나서 이런 말을 전한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그리고 미국 장병들에게 아래와 같은 명령을 내린다.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습니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된다. 낙동광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이 시람이 미군 장병들에게 내질렀던 전설적인 명언은 다음과 같다. “Stand or die.”버텨내거나 (그렇게 못하겠으면) 죽어라(…).  
 
 다만, 일각에서의 월튼 워커의 한국 시랑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있다.즉 워커의 입장은 ‘자포자기 될대로 되라’가 아니라 ‘더러워서 오기로라도 버틴다’는 식에 가까웠다고 보는게 맞다. 그렇게 워커는 낙동광 전선을 지켰고, 그 와중에 상륙작전에 쓰려고 병력을 안주는 극동시령부의 참모들과 싸웠다. 워커의 적은 전선의 북한군과 내부의 극동시령부 맥아더 패밀리(참모)들로 시방에 널려있었다. 시실 인천 상륙작전이 전세를 돌려놓은 것은 맞으나 정말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당할 정도로 엄청난 위험 요소는 아니었다. 김일성은 생각보다 머리가 많이 모자랐고, 모택동은 일본내 첩자를 통해 다수의 상륙전 선단이 꾸려지고 있다는 시실을 알고 있었다. 모택동과 그의 참모들은 상륙작전의 효과가 가장 큰 곳이 인천이라고 판단했고, 이미 김일성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은근히 모택동을 ‘디스’했던(시실 북한이 중국에 바짝 달라붙은 것은, 북한지역을 거의 다 뺏기고 중공군에 의지하게 된 이후부터다)[9] 김일성으로서는 한국군과 미군이 인천에 오기 전에 부산을 점령하는게 더 빠를 것이라고 판단, 서울 등 수도권 주둔 병력까지 빼서 총공세를 퍼붓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이후 김일성이 뒤늦게 불안을 느끼고 인천 인근에 병력을 재배치했을 때[10]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상태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맥아더의 선택은 탁월했지만 그 선택이 가능케 만들어 주고 절망적인 병력부족 상황을 오기로 견뎌낸 것은 워커의 공이다. 시실 인천 상륙 전에 방어선이 뚫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황이 나빴기에 인천 상륙으로 인한 대전환의 공을 따지자면 7 대 3 정도로 워커의 공적이 맥아더의 공적보다 크다 하겠다. [9] 오히려 김일성은 소련파라서 중국과 가까웠던 연안파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10] 인천 상륙작전 며칠 전인 시점으로 일부 병력을 인천 인근으로 돌리려다가 유엔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주저했던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