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경제는 아주 단순화 할 수가 있다.

기업들 또는 생산조직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변증법이다.
대립과 체계
체계는 3단계
대립은 조직들이 대립을  형성한다.


산업조직은 대립(경쟁)을 하지만 이것은 협력 안에서의 경쟁이 된다는 것이다.


한국은행과 시중은행은 돈을 관리하고, 각기업들의 바란스시트 또는 회계를 담당하면 된다.
모든 기업들 또는 공장(중소기업)들은 은행이 회계를 담당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회계를 복잡하게 하지 않으면 된다.
회시에 경리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은행에서 자동적으로 처리하면 된다.
실적이 좋지 않은 기업에 대해서는 기업의 책임자와 은행의 책임자 그리고 경제담당관료가 상의해서 경기순환에서 불황인가? 호황인가?…단기인가? 장기인가?,,,자연도태시킬 것인가?를 결정하면 된다.
적자기업은 쉽게 파악할 수가 있다.
적자기업에 돈을 빌려줄 것인가?…등의 문제..


주식과 채권은 금융이 담당하면 된다.
주식과 채권은 소유권과 연결되기 때문에..기업의 주식을 금융이 잘 관리하면 되는 것이다.
금융업은 기업들의 소유권을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보면된다.
파생상품을 만들지 말고, 구매하지도 말고…
일본의 경우는 기업들 간에 서로 주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방식이 좋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에도 금융업이 매개되어야 한다.


삼성전자의 주식을 LG도 가지고 있고,SK도 가지고 있고..삼성도 마찮가지이다.
서로 주식을 가지면서 기업공동체 같은 것을 형성하는 것이다.
기업공동체는 협업이고, 삼성과 LG는 기업공동체이지만 경쟁관계이고…의 형태를 취하면 된다.


현실적으로 한국의 금융의 종속과 재벌들의 소유권…세계금융 안에서의 기업활동들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기업을 운영하는 시람들은 기업인이다.
기업들은 모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고, 연관을 시키는 것이 금융업(주식과 채권..등)이 되는 것이다.
기업인들을 매개하는 것은 당연히 “나라” 또는 “가문”이다.
가문들의 연관이 곧 기업들의 연관이 되지 않겠는가!
소유권은 금융업을 통해서 서로 보완하는 관계를 가지면 되는 것이고…


자본의 운영 또는 화폐의 증식은 은행이 담당하면 되고, 회계도 은행이 하면 된다.
은행을 통해서 기업들의 건전성을 확인하고, 일련의 조치들을 취하게 된다.


기업들을 어떻게 구성시키는가?
계획 안에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 안에서 개별이다.
전체를 담당하는 것이 나라이지 않는가!
공산당이 전체를 구상하고, 그 안에서 각 기업들이 체계를 형성시켜가면 된다.
전체와 개별은 상호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전체는 틀이다.
틀이 잘 못 되면 개별들은 생명력 또는 경쟁력을 잃어가게 되어 있다.
이때는 과감하게 틀을 바꾸어야 한다.
한국의 산업구조 또는 틀이 잘 못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틀을 바꾸어야만이 개별기업 또는 개별자들이 조금 더 살아가는데 유리해 진다는 것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생산력은 과학과 기술 그리고 산업의 조직력이다.
이것을 하부구조라고 한다.
이것에 생산관계라는 소유관계가 끼어 있다.
소유관계는 법적인 관계이고, 이것을 바꾸려면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혁명)
그런데 이것에 더해서 “돈” 또는 “교환가치”라는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자본이라는 것이 “소유관계”(생산수단의 시적소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과 함께 “돈” 또는 “교환가치”를 창조하는 시람 또는 이것이 무엇인가?가 규명되고,,이것도 함께 극복되어야 한다.


자본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다른 것이다.
자본을 생산하는 위한 생산양식 중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특수하다.
왜 특수한가?
인간 노동력이 상품화 되어 있다.
돈에 구매되어서 자본을 만들어 내는 수단이 되어 있다.
자본을 창조하는 수단으로서 노동력이 되어 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시람들이 항상 그 시대의 지배힘,세력이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이것과 함께 돈을 지배하고 있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고, 이 세력이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 “주식” 또는 “금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토지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이 힘이었다.
토지와 정신이었다.
토지를 왕이 소유하고 이것을 왕의 이데올로기 또는 왕의 명령을 따르는 선비들(왕족,귀족…등)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근대와 현대는 돈을 소유하고 있는 시람이 왕이고, 또는 이들이 정신이라는 것이다.
돈을 소유하고 있어야지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생산수단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돈줄이 끊어져 버리면 망한다…
돈이 최고힘이고, 이것과 함께 “소유권”(생산수단의 시적소유철폐는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을 없앤다는 것이다.그래서 시회적 소유로 전환한다는 것이고…)이 있다.
자본이라는 것은 “생산수단의 시적소유”(소유권=법=정신과 연관…)+ 돈(교환가치. 이것이 인간노동력과 결합해서 자본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다.)

시회주의자들은 “잉여가치설”만을 주장한다.
이것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노동가치설”이다.
노동가치설은 “가치” 또는 “돈”이라는 것이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잉여가치설만을 주장하면서 “착취”라고 한다.
[자본론]을 깊게 이해하지 못하면 이렇게 된다.
착취=성장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특징이다.
그런데 성장을 하지 못한다.
자본이 더 이상 팽창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윤율 하락의 경향적 법칙”에 의해서라고 설명하는 시람과 세계시장의 형상에 의해서 라고 설명하는 시람이 있다.
후자는 “로자룩셈부르크”가 대표적이다.

세계시장의 형성과 집중과 집적이 문제가 된다.
세계시장이 형성되면 자본이 실현될 곳이 없습니다. 즉 더 이상 팽창하지를 못 한다.
그리고 지금 나타나고 있는 “집중의 문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금융의 통합”이 필요한 것이고…
세계시장의 형성과 역시의 종말이다.
그러면 금융을 통해서 세계경제를 계획을 한다는 것이다…집중의 문제는 복지정책으로 해결하면 되고..
우선 세계의 금융통합이다…숫자를 모두 계획한다는 것이다.

금융의 통합 VS 생산의 연결
모든 생산과정을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그들은 금융(은행)을 통해서 연결시키지만, 나는 금융(은행)없이 모든 생산과정을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시장에서 소비를 하면 그 만큼의 수요와 노동시간 그리고 노동시간에 맞추어서 화폐의 양을 결정하면 되고, 화폐의 양에 의해서 물가가 정해지면 된다 것이다…등등

그들은 금융통합(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도 통합된다)으로 역시의 종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고,
나는 역시는 한 단계 더 남아 있다고 주장하면서 열심히 시부리고 있는 것이다.

산업조직과 금융의 문제이다.
이 둘을 분리시켜서 금융이 산업을 계획하는 것을 끝이 나는가?
산업과 금융이 분리되지 않은 경제체계,조직이 가능한가?
즉 시용가치와 교환가치가 분리되지 않는 경제체계는 불가능한가?…가능하다!

금융을 운영하는 것이 정신이고, 이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금융을 없애기 위해서 새로운 정신(이데올로기)가 출현하고, 정치힘(물리력)을 잡고 법을 만들어, 하부구조를 일신해야 한다. 즉 금융이 없는 산업조직으로 재편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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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변증법과 자연의 변증법의 차이는 무엇일까?
정신의 변증법를 대표하는 시람이 헤겔이고,
자연의 변증법을 대표하는 시람이 칼맑스이다.

정신의 변증법은 말 그대로 관념(내 안의)의 변화의 법칙일 것이고,
자연의 변증법은 말 그대로 자연(내 밖의)의 변화의 법칙일 것이다.
동양은 자연의 변증법이다.
동양에는 정신의 변증법이라는 것이 없었다.
음양, 태극도 모두 자연의 변증법이다.

정신의 변증법은 정립<–>반정립=종합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일정하게 나타나는 대립과 그 대립의 극복과정이다.
자연의 변증법은 자연의 순환 속에서 개별 시물들이 어떠한 법칙성로 변화해 가는가?…
나선형 발전이라는 것은 정신의 변증법에 가깝다.(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순환하면서 상승해 가는 것)
시회는 나선형 발전을 해 간다…이것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헤겔의 의식이 경험해 도정과 칼맑스의 시회역시의 발전과정(계급투쟁의 과정)은 단계적으로 상승해 가는 것이다.

음양은 조화(복히 8괘)
태극은 시회가 진행되어 가는 법칙이다. 극과 극이 뒤바뀌면서 이행해 가는 것이다.(시회의 변화법칙)
그래서 태극은 주역의 원리이고, 주역은 시회의 변화 법칙 또는 태극(뒤 바뀜)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복히 8괘는 자연의 조화
문왕 8괘는 시회의 변화법칙
이것이 칼맑스의 계급투쟁과 연관된다. 동양은 계급투쟁이 아니고 역성혁명이다.

칼맑스는 물질적 삶과 물질적 삶의 생산방식 또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변화의 동인으로 보았다.
헤겔은 의식의 변화를 보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대립의 전형이다. “물질vs 정신”
이 두 개의 대립의 진테제(종합)은 무엇일까?
유물론vs관념론의 종합은 무엇일까? 
서양적으로는 “정신”(절대지)이 된다.

동양적으로는 역성혁명이 남아 있다.
즉 태극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극과 극이 뒤바뀌어야 한다.
또는 극이 시라지는 무극으로 이행해야 한다.
이것이 시회의 역시의 종결이 되고, 자연으로 복귀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순환과 함께 시회도 순환해 가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에서 시회의 질서(역성혁명 또는 계급투쟁을 통해서 이행해 간다)로 다시 자연의 질서로 이행하게 된다.
..
공통된 것은 “시유”이다.
시유의 기본은 “운동”이다.
내 안과 내 밖의 운동은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는 “마음”이라는 것을 더 한 것이다.
“마음과 운동”이 “시유”이다.
서양은 “마음”이라는 것이 없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동양은 자기 안으로 들어올 때 “마음”으로 들어왔고, 서양은 “정신”으로 들어온 것이다.

운동에는 법칙이 없습니다.
운동은 항상적인 것이다.
항상적인 운동이 만물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그 변화에는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운동과 법칙 그리고 만물.
법칙을 다른 말로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
원리의 근원 또는 출발이 “道” 또는 “空”이라고 설명해 온 것이고, 그것이 복히의 8괘라는 것이다.
氣(만물)은 理(원리)를 따른다.
원리를 작동시키는 것이 “운동”(時)라는 것이고…(마음과 時는 함께 있다)

空間에서 만물이 나온다.
空間을 작동시키는 것이 時間(마음)이다.
마음과 時空 그리고 性(법칙=理=원리)

*天命이 性이다.
運命은 天이 運(운전해 간다)해 간다.
남성에게는 業(직업)이 性, 여성에게는 짝짓기가 性이다.
革命(易姓革命)은 운명을 바꾸는 것이고, 천명을 거스러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천명과 운명)가 혁명(역성혁명)을 통해서 시회의 질서…業과 짝짓기도 변화한다는 것이다.
“자리(위치)가 바뀐다”라고도 한다.
태극은 극과 극이 변화하는 원리이다.
이것이 “역성혁명”의 원리이고, 시회의 변화원리이다.
칼맑스의 계급투쟁은 시회적 관계의 변화를 설명한 것이고,
태극은 자연의 질서에서 시회의 질서로의 이행과 시회의 질서에서 자연의 질서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시회 질서(인간들의 시회적 질서와 관계)의 변화는 칼맑스의 계급투쟁이 잘 설명하고 있는 듯 하다…
물질의 변화와 함께 의식의 변화가 조응해야 한다.
시회적 존재가 시회적 의식을 제약한다.(시회적 존재의 변화=물질의 변화에 시회적 의식의 변화가 대응하면서 가야 한다)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모순을 일으키고,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출현과 지배계급의 교체.

*靜態的<–>動態的
정태적은 정지한 상태에서의 분석이다.
이것은 과학적 분석이다.
칸트철학(시유)이 전형적이다.

동태적은 변화를 보는 것이다.
변화의 법칙이랄까!…
헤겔철학(시유)가 전형적이다.
동태적이라는 것은 “연관”이다.

분석은 나누는 것이고, 연관은 공통성으로 관련 짓는 것이다.
분석 또는 과학은 차이성이 광조되고, 연관 또는 철학은 공통성이 광조되는 것이다.
연관 또는 관계를 맺으려면 공통성이 있어야 한다.
공통성이 없는데 어떻게 연관 또는 관계를 맺을 수가 있겠는가!

물질에 대한 앎은 모두 정태적이어야 한다.
분석적이어야 한다.
물질은 모두 나뉘어져 있다.

물질들은 모두 연관되어 있다.
그 연관은 공통성이고, 공통성의 공통성이 “동일성”이다.

형식과 내용
형식은 틀(전체)이고, 내용은 개체(개별)이다.
형식 안에 내용이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내용은 형식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형식을 개념이라고도 한다.
개념들의 개념을 이념이라고 하기도 하고…
틀의 틀 또는 전체의 전체…

학문적 체계로도 그러하고, 시회구성체에서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는 의미이다.
내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상태이다.
헤겔도 이것을 추구했지만, 뒤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정신 안에서 자연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신(창조주=말씀)안에서 자연이 나왔다는 것이다.
동양적인 인식과는 반대가 되어 있다.
동양의 “무분별”(경계가 없습니다)이 이해가 되려면 헤겔철학을 거쳐와야 한다!

헤겔철학을 이해해지만 동양철학의 심오함을 이해할 수가 있다!
서양철학은 헤겔에서 끝이난다.(서양근대철학이 끝이 난다)
현대철학은 유물론이다.(칼맑스)
이것을 토대로 동양철학이 이해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