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과 선험성에 대해서

경험과 선험성은 칸트철학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언급되는 것이다.
경험이 경험론 또는 유물론과 연관되는 것이고,
선험론이 관념론 또는 형이상학이 되는 것이다.
 
도올 선생님의 “붕어빵 틀”로 설명하면 단순하다.
붕어빵을 생산하려면 붕어빵의 재료들과 붕어빵틀이 있어야 한다.
부엉빵의 재료들이 “물질”로 표현되는 것으로,경험으로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경험이라는 것은 나의 외부의 어떠한 대상을 알려면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
남들이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을 책을 통해서 경험하는 간접경험도 “경험”에 속하는 것이다.
 
붕어빵들의 재료들이 “붕어빵 틀”에 의해서 “붕어빵”이 되는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은 “붕어빵 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붕어빵의 재료들과 나의 감각기관(육체)는 경험의 영역으로서 물질에 속하는 것이다.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의 논쟁
이 둘을 종합하려고 한 것이 칸트이다.
어떻게 종합을 하는가?
 
붕어빵 틀을 “선험성”으로 전제하면,
선험성에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감성”과 “오성의 틀로서 12범주”가 있다는 것이다.
 
붕어빵의 재료들이 나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입구가 “인식”으로서 “공간과 시간”이라는 감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붕어빵의 재료들이 내 밖에 있는 존재(물질)이고 이것이 나의 안으로 들어오려면 감각기관에 현상으로 나타나야 한다.
감각기관에 나타난 현상들은 감각기관의 산물이 아니고 “인식”의 산물이다.
“인식”을 칸트는 “공간과 시간”으로 설명하고 “감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인식”을 “마음”으로 설명하고 “아뢰야식”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감각기관에 현상으로 외부의 물질들이 나타나려면 감각기관은 살아 있어야 한다.
감각기관이 생명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 생명이 느낌이고 느낌이 마음이라는 것이다.
외부의 물질이 빛을 통해서 나의 눈에 나타난다고 할때,,이때의 전제는 “생명”이다.
외부의 물질이 감각기관에 나타난다는 의미는, 감각기관에 나타난다는 것이 아니고 “인식”에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 바른 것이다.
감각기관에 외부의 물질이 현상되려면 감각기관은 살아있어야 하고,살아 있기 때문에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붕어빵 재료들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관문은 “인식”이다.
인식을 칸트는 “공간과 시간으로 또 감성”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 또는 감성”이 선험성이고,이것을 통해서 붕어빵의 재료들이 들어온다.
이 붕어빵 재료들은 다시 오성의 틀인 12개의 범주틀에 맞추어져서 통각작용이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도…
“붕어빵”이 된다는 것이다.
“붕어빵”은 “오성적 개념”이 된다는 것.
 
현실에서는 밀가루와 팥이 붕어빵 재료이고 붕어빵틀을 통해서 붕어빵이 되지만…
관념론적으로 해석하면 밀가루와 팥이라는 내 밖의 구체적인 물질이 나의 육체인 감각기관을 통해서 현상되고 현상된 것은  “인식”의 문을 통해서 12개의 오성적 범주틀에 맞추어져서 오성적 개념(붕어빵)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현상 됨이 인식이 되는 것이다”
 
경험은 물질이고,이 보다 먼저 “선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선험성이 “공간과 시간으로서 감성”과 “오성의 12개의 범주”라는 것이다.
 
물질에 대한 앎은 과학이고,이것은 순수한 경험이다.
그런데 “순수한 이성”은 있는가?
이것을 비판한 것이 칸트이다.
 
순수한 이성은 없습니다는 것이다.
순수한 이성은 경험을 떠나서 있는 이성을 의미한다.
칸트에게는 “영혼,우주,신..”같은 것으로서 “물자체”로도 표현하는 것이다.
“불가지론”으로 설명되는 것들이다.
 
칸트는 인간 인식은 경험을 떠날 수는 없지만, 경험 이전에 “선험성”이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경험을 떠나서 있는 “이성”(순수 이성)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경험과 선험성은 같이 있지만, 경험 이전에 선험성이 먼저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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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에게도 “현상”은 있다.
동물들에게도 경험된 것들이 학습되기도 한다.
이것은 “인식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인식은 칸트가 이야기 하는 공간과 시간이 아니다.
인식은 마음이다.
이것은 “감성”이라고 표현해도 무관한 것이다.
현상들은 감성을 통해서 인식되고 인식된 것은 뇌의 작용에 의해서 의식화 되는 것이다.
의식에 오성의 단계가 있고, 이성의 단계가 있다는 것이 헤겔의 [정신현상학]
 
인식은 저장소 또는 아뢰야식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자연에서 인간으로 이행하는 곳에서 말이 발생하고,말과 “인식작용”은 같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인식작용이 끝이나고 다음에 “의식”의 출현으로 空(복히)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말은 깨달음이고, 의식은 앎이다.
말의 출발은 신들림(미치다)이고,의식의 출발 또는 앎의 출발은 空으로 설명해 온 것이다.
말은 디오니소스적이고, 문자(의식)은 아폴론적이다.
말이 선천, 문자(의식=앎)이 후천.이 둘의 합이 “삼천”
 
물질 이전 또는 경험 이전에 무엇이 있었다.라고 하는 것이 “선험성”으로 표현되지만,
“선험성”은 형이상학이 되는 것이다.
칸트의 경우는 선험성이 경험 또는 물질과 함게 있다는 것이다.
 
헤겔과 나는 선험성은 물질 또는 경험을 넘어설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칸트는 경험론적인 시유틀과 시유내용이 오성적이라는 것이다.
경험론 또는 경험(물질)을 넘어서 물질 외에 다른 것을 시유할 수가 있는가?
시유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칸트와 헤겔의 차이는?
경제용어에서 “靜學的”<–>”動學的”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칸트는 역시적인 전개를 따라서 서술한 것이 아니라,그 많은 지식을 정지된 상태에서 종합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변증법”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이러한 것을 “정학적”이라고 한다.
헤겔은 역시의 전개를 따라서 자기의 시유를 전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학적”이라고  하는 것.
변증법은 역시적인 흐름의 운동,리듬을 타지 않으면 어려운 시유이다!